열여덟. 첫눈이 땅을 덮기 일주일 전, 괴상망측한 꿈을 꾸었다. 비나 눈이 올 것처럼 흐렸지만 아직 아무것도 내리지 않은 날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농장에서 쓰는 트럭을 몰고 지미의 집 앞을 지나다, 우연히 우편함 근처에 서 있는 녀석을 보았다. 평소 글과 책보다 나대고 떠드는 것이나 좋아하는 지미가 안경을 낀 채로 한 손에는 어울리지 않게 신문을 들고 있었...
건조주의보가 내린 날이었다. 2월의 시작이었고 낮부터 바람이 세게 불었다. 마을의 뒷산에서 최초의 발화가 있었다. 불은 산을 태우다가 바람을 타고 차츰 마을로 돌진해왔다. 꽤 오랫동안 아무도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공식적인 보도상으론, ‘한 치킨 배달원’의 신고 후 비로소 진화작업이 시작되었다. 우리 아버지는 닭장사를 한다. 나는 야식을 배달하던 참이...
<일어나> 누군가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일어나. 인제 일어나야 돼. 지민아> 나는 눈을 떴다. 눈을 떴음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앞이 하얗게 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심해에서 막 수면 위로 올라온 사람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손바닥으로 눈두덩을 번갈아가며 눌렀다. 숨을 쉬는 게 약간 힘들었지만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여긴 어디일까...
[무지방 우유 숏사이즈 다크 로스트 카푸치노, 카페인은 1/2, 시럽은 빼주시겠어요?] 커피를 드시겠냐는 내 질문에 전정국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이미 손에 들고 있던 믹스커피 봉투와 종이컵은 철저하게 무시한 처사였다. 실은 나를 무시한 것이나 다름없었고, 기선을 제압하려는 불손함마저 느껴졌다. 미친놈이. 검찰청이 카페라도 되는 줄 아는 거야? 나는...
오늘, 사람을 죽여야 한다. 나는 몇 번이나 제복의 단추를 잘못 채웠다. 낡은 단추가 견디지 못하고 셔츠에서 툭, 떨어져 나갔다. 또르르 굴러가 닿은 곳은 장식장의 끄트머리. 지민이 나 대신 허리를 숙여 단추를 주워들었다. 허리를 핀 그의 시선이 장식장 위 표창패에 닿았다. 그가 상패에 새겨진 상투적인 문구를 소리 내 읽었다. [위 사람은 용맹과 기지를 발...
전역하고 돌아온 집 마당에는 봉선화가 피어있었다. 전투화를 벗어 마루 밑에 밀어 넣고, 고무신을 꺼내 신는 동안 슬레이트 지붕은 빗소리로 요란했다. 시멘트 블록 담 밑으로 작은 화단에 핀 봉선화들이 꽃잎에 맺힌 물방울의 무게로 고개를 자꾸 꾸벅거렸다. 엄마는 오랜만에 본 아들을 반가워했지만 수선을 떨지는 않았다. 지민은 없었다. 그가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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