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업데이트된 유튜브 영상을 보려던 참이었다. 방은 한낮임에도 어두웠다. 암막 커튼 사이로 얇게 스며든 빛이 침대를 칼날처럼 가로질렀다. 내가 구독 중인 유튜버는 목에 상처를 입은 채 버려져 있던 강아지를 구조하고 입양한 뒤 일주일에 한두 번씩 영상을 업로드했다. 영상의 재생버튼에 막 손을 댔을 때 전화가 와서 실수로 통화 거부를 눌렀다. 그럴 리가 없다...
정국은 피아노 교습소를 마주 보고 있는 한 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정국보다 먼저 도착한 학부모들이 서로의 가정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심상한 이야기들을 나누는 동안 정국은 이따금 땅을 차며 자기 발만 내려다보았다. 예전에 몇 번, 학부모들이 젊은 아빠라기에도 너무 어려보이는 정국에게 동생을 데리러 온 거냐고 살갑게 말을 붙인 적이 있었다. 그...
처음으로 떴던 것은 누구나 그렇듯이 목도리였다. 새하얗고 예쁜 실을 아낌없이 사용했으나 완성된 것은 포근한 걸레짝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두 번째로 뜬 것은 작은 곰 인형. 처음 잡아본 코바늘로 뜬 것이었고 눈의 위치를 잘못 잡아 조금 기괴한 모양새가 되었다. 다음엔 무모하게도 갑자기 브이넥 조끼에 도전했는데. 목이며 소매 둘레 고무단이 약간 늘어졌지만...
항구를 떠난 배가 일몰의 바다로 서서히 젖어 들어갔다. 멀리 떠 있는 배들은 한 폭의 그림처럼 해풍에도 흔들림이 없어 보였다. 다만 내가 탄 배 쪽으로는 세찬 바람이 불었다. 태형은 화물칸의 차에서 눈을 좀 붙이겠다며 운전석 의자를 뒤로 젖혔다. 잠 핑계를 댔어도 카메라를 끼고 있어야 마음이 놓이는 녀석이었기에 나는 자리를 비켜줄 요량으로 성큼 2층 선실로...
지민은 전화를 끊기 전 별 기대 없이 어디야? 하고 물었다. 진은 고동, 지금 고동이지, 하고 유쾌한 어조로 대답했다. 고동이라니, 그게 도대체 어딘데요, 하고 되묻기 전에 진은 그럼, 잘 지내라. 작별 인사를 했다. 하지만 전원 버튼을 잘못 눌렀는지 전화는 끊어지지 않았다. 지민이, 형, 형...? 연거푸 불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고 휴대폰은 이미 주머...
정국이 필기구에 처음 매력을 느낀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시작은 연필. 친구가 가진 빨강색 일제 연필 한 자루와 교환하기 위해 정국은 아버지 우표책에서 희귀우표 한 장을 빼돌렸다. 빨강색 연필은 비싸고 좋은 거라고 했고, 아버지의 예쁜 우표도 비싸고 좋은 거라고 했었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 더 가치가 있었는지는 모른다. 아무튼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
행어가 무너졌다. 태형은 자다가 ‘쿵’ 소리에 놀라 눈을 떴고 지진이 났나 싶어 어둠 속에서 두리번거렸다. 소리가 더 이어지지 않아서 조심스레 방 밖으로 나갔다. 거실 겸 부엌의 불을 켠 뒤 화장실을 살펴봤고 옆방의 문을 열어본 뒤에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었다. 벽 쪽에 세워둔 2단 행어가 무너졌다. 새벽 두시에 방은 옷들의 무덤이 되어버렸다. 누...
집은 아버지가 직접 지었다. 부지의 나무들을 베지 않으려고 정면이 좁은 대신 기다랗게, 도로에 가깝게 지었다. 아버지는 나무들 사이 조그만 공터들에 돼지우리와 염소 축사와 닭장을 세웠다. 염소 축사로 가려면 돼지우리를 지나쳐 가야 했다. 땅은 똥 때문에 검은색으로 질척거렸고 어려서는 그 철벅대는 걸음이 재미있었다. 여섯 살 어떤 날에, 나는 신발을 신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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